

The Night of Perjury
Written By. 에덴
유람선은 크기와 장식의 화려함이, 그 지위와 용도가 갖춰야 할 위엄을 압도하며 사파이어나 흑요석보다 깊고 짙푸른 밤바다를 횡단했다. 뱃머리는 해안과의 거리나 수심 모두 평범한 어선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수치를 기록하는 물살을 갈랐다. 배의 평균 시속은 7노트 미만을 가리켰다.
출발지와 목적지가 같은 이 선박은 현재 수도에서 이름 높은 SOL 테크놀로지 사(社)의 소유다. 다수의 귀족 가문과 수완 좋은 경영진이 손잡고 사업하는 SOL 테크놀로지는 1년에 2번, 자신들의 막대한 부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력을 유감없이 자랑하기 위해 배를 띄웠다. 넘쳐나는 인맥들과 친교를 맺는 것이 명목으로 내걸렸다. 속으로는 지극히 냉혹하고 이기적인 계산기를 두드리는 위인들도 높은 이익을 가리키는 셈을 믿고 초대장에 감사를 표하는 답장과 함께 승객이 되어주곤 했다.
그러나 겉보기로나 호적으로나 특출난 구석이 없는 일개 학생인 유사쿠가 무려 SOL 테크놀로지의 호화 유람선에 승선한 이유는 성씨나 실적이나 인맥에 걸려 있지 않았다. 친목은 말씨 고운 구실에 불과한 유람선은 비밀리에 이 재력 있는 승객들을 상대로 지하 경매장을 열곤 했다. 유사쿠는 이번 출항의 경매에 오를 물품 중 하나를 출품했다.
출항은 거만한 승객들의 요구에 맞춰 늦은 오후에 이루어졌다. 그들은 자신이 SOL 테크놀로지에 명령과 압박을 넣을 수 있는 위치라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유사쿠가 보기에 당사자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술력은 아무도 SOL 테크놀로지의 성역에 흙발을 들이밀지 못하게 가로막는 불의 검이 됨과 동시에, SOL 테크놀로지가 수도의 내로라하는 귀족들마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하는 거인의 손이 되어줄 터였다.
그러나 미래의 일은 제쳐두더라도, 객실에 짐을 풀자마자 저녁 식사 시간에 걸렸다. 정각보다 조금 늦게 홀에 당도하자 이미 장내는 발길이 부산스러웠다.
홀은 붉은 털이 섬세하고 촘촘하게 돋아 금실 자수로 각 귀퉁이와 중앙을 장식한 융단이 빈틈없이 깔려 있었다. 부드러운 크림색 벽에 한가득 달린 유리창은 가로보다 세로가 월등히 길어 마치 고귀한 칼날 같았고, 창틀은 전부 도금하여 수백 개가 넘는 유리가 알알이 박힌 샹들리에의 불빛을 때로는 화려하며 때로는 은은하게 반사했다. 고급 향신료와 식재료로 은으로 된 식기를 가득 채워 치장한 식탁이 뷔페의 절정을 향해 가는 동안, 악사들이 손톱 끝까지 다듬은 손짓으로 악기를 어루만지며 귀를 위한 만찬을 더했다.
호화로움이 가장 명예로운 왕관인 듯이, 돈으로 자수를 놓은 연회의 베일이 홀에 드리워져 있다. 유사쿠는 그 자리에 자신의 발걸음을 더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므로 먹을 것만 접시에 덜어 자신의 이름표가 멋들어진 은장식에 꽂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SOL 테크놀로지는 테이블보와 작은 은촛대에만 돈을 베푼 것이 아니라, 테이블의 숫자에도 인심을 베풀었다. 그러니 유사쿠가 선택한 테이블에도 다섯 종류가 넘는 색실과 금은 실로 무늬를 넣은 흰 테이블보와 양초를 세 개 올릴 수 있는 고풍스러운 은촛대가 장식되어 있었으며, 모든 테이블에 각 손님―만일 동승객이 있다면 대표자의 이름표가 꽂힌 은장식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를 알고 있는 유사쿠로서는 자신이 어째서 처음 보는 낯선 인물과 합석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샴페인은 됐습니다.”
상대는 유사쿠의 시선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막 샴페인 잔을 쟁반에 담아 홀을 돌아다니는 웨이터에게 잔잔한 거절의 말을 건넸다. 그는 유사쿠보다 분명 조금 연상에, 성인의 경계 너머에 발을 디딘 나이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옷차림도 가볍다. 만찬 자리에 와이셔츠와 청바지 한 벌씩 걸친 것으로 차림새를 마무리한 유사쿠와 큰 차이 없이, 가슴이 깊이 파인 티셔츠에 재킷, 식탁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면바지가 전부였다.
유사쿠는 그의 외양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으나, 샹들리에와 촛불의 불빛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 은발은 깨끗하고 부드러웠으며, 그 어떤 창공이나 바다마저 비견할 수 없이 아름다운 벽안 주위로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짙었다. 만약 시선을 교환한다면, 미추를 구분하는 감각에 탁월하게 둔한 유사쿠라도 아름답다고 깨달을 수 있는 외모였다. 지식인의 태가 드러나는 길고 우아한 손은 의외로 그 얼굴처럼 색조가 어두운 편이었으며, 곧 포크를 쥐어 나이프로 작게 썰어놓은 스테이크를 입안으로 옮겼다. 그 입술은 음식을 먹느라 윤기가 돌아 적당히 도톰하며 선명한 빛깔을 띠는 모양새와 함께 보기 좋았다.
유사쿠는 나이를 이유로 샴페인 잔을 거절하고 커피로 목을 축였다. 부모를 따라온 입맛 까다로운 자제들을 위한 주스가 비치되어 있었지만, 유사쿠는 단 것에 그리 익숙하지 않았다. 눈앞의 상대, 즉 유사쿠와 마주 보고 앉은 남자는 커피조차도 없이 깨끗한 물 한 잔만 크리스털 컵에 담은 채였다.
둘 사이의 대화는, 남자가 마땅히 앉을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며 유사쿠에게 합석을 부탁하고, 그 요청을 유사쿠가 얼떨결에 수락한 것이 전부였다. 유사쿠는 아직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 물론 자기소개를 하며 대화의 물꼬를 여는 일에는 유사쿠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재능이 없다. 따라서 냅킨으로 예의 바르게 입가를 닦은 남자가 먼저 입을 연 것은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의 도움이 되었다.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합니다. 본래 나도 지정 좌정이 있었지만, 낯선 일행에게 빼앗겨서 어쩔 수 없이 실례하게 되었어요.”
“…그런가요.”
그가 존댓말로 말을 걸어왔기에, 잠시 미적거리던 유사쿠의 입에서 어색한 존댓말이 나왔다. 존댓말이 입에 붙지 않는 건 말수가 평소에도 적은 편인 탓도 있지만, 공손하게 말을 높일 만한 상대가 주위에 별로 없던 탓도 있다. 남자는 유사쿠의 반응이 희박한 성격에도 개의치 않고 희미하게 웃음을 유지했다. 타인에게 호감을 주기 쉬운 미소 때문인지, 남자의 인상은 눈매가 영민하고 날카로운 것 치고 온순하게 느껴졌다.
“마침 당신을 고른 건 이 주변에서 흔치 않게 혼자 앉아있는 데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여서 그랬습니다. 아마도 고등학생?”
“아직 1학년입니다.”
“과연. 나는 올해로 18살.”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만 보더라도 나이는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는 정보였으므로 유사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에 대해 남자가 자신의 나이를 학년이 아니라 굳이 숫자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은 조금 의아했으나 유사쿠는 당장 그 의문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 후로도 몇 마디 무겁지 않은 잡담을 나누고 남자는 자신을 료켄이라 소개했다. 유사쿠는 조금 망설이고, 상대가 성씨 없이 이름만 알려온 것에 맞추어 자신도 유사쿠라는 이름만 댔다. 료켄은 유사쿠에게 자신을 존칭 없이 불러 달라며, 자신도 이름으로만 불러도 될지 물어왔다. 첫인상만큼 깍듯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유사쿠가 연하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조금 허물없이 굴어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유사쿠는 그가 원하는 대로 부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아직 어린데도 혼자 앉아있군. 다른 일행은 없는 건가?”
“처음부터 혼자 배에 탔었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혼자로 보이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인데.”
“유감이지만 나는 동승객이 있지. 사정이 있어서 잠시 헤어졌지만.”
그는 구태여 사정이 있다는 말을 강조했다. 유사쿠가 썼던 표현을 돌려주기라도 하는 듯이. 유사쿠는 눈가를 살짝 찡그렸지만, 이내 표정을 다시 지웠다. 그다지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유사쿠는 고개를 조금 돌려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덕분에 대화는 잠시 끊을 수 있었으나 저를 탐색하는 시선은 알아채지 못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멎어 고요해진 테이블 위로 다른 테이블에서 무례하게 건너온 인기척과 고급스러운 식기조차 낮출 수 없는 소음이 끼어든다. 문득 유사쿠는 자신의 접시가 거의 비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장기 학생인 데다 끝도 모르고 줄지어 피어오르는 만찬의 풍족함, 그리고 낯선 사람과 앉아있다는 사실이 손의 움직임을 부지런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그에 반해 마주 앉은 료켄은 식사 예절이 고상한 겉모습에 비교해 음식이 줄어드는 속도가 느렸다. 식사 자체가 몸에서 잘 받지 않는 것처럼. 잠시 료켄을 자리에 남겨 두고 새로 그릇을 채워올 것인지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안녕, 도련님들? 잠시 실례할게요.”
맵시 좋고 매끄럽지만 울림이 낯선 목소리가 측면에서 끼어든다. 의도치 않게 유사쿠와 료켄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포도주빛 이브닝드레스를 관능적으로 차려입은 여성이 어느새 의자를 버젓이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목을 감싸며 몸의 전체적인 윤곽을 은근하게 드러내는, 성숙한 성인의 느낌을 물씬 자아내는 차림새와는 다르게 손짓으로 인사를 건네는 모양새는 천연덕스럽다. 다른 쪽 손에는 낯익은 샴페인 잔이 희석한 꿀 같은 미백색 음료를 찰랑거리며 가볍게 쥔 채였다. 유사쿠로서는 두 번째 합석이다.
본래 테이블의 주인인 유사쿠는 입을 다물고 미간만 찌푸렸다. 료켄도 호의적이지 않은 표정을 짓는다. 최소한 둘 중 한 명은 당장 목소리를 높여도 무방한 상황이었으나, 두 사람 모두에게 공평하게 초면인 여인은 틈을 주지 않았다. 집게손가락을 곧게 뻗어 립스틱을 꼼꼼하게 바른 입가에 가져다 대더니,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려 쉿 소리를 냈다.
“미안하지만 잠깐 신세 좀 질 수 있을까? 혼자 왔는데, 저기 어떤 도련님 하나가 계속 쫓아다녀서 말이야.”
요는 적당히 눈속임으로 귀찮은 떨거지를 떼어내는 일을 도와달라는 뜻이다. 유사쿠는 그제야 여인이 티 나지 않게 눈짓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과연 옷차림의 귀티와 다르게 소심한 얼굴로 이쪽 테이블을 힐끔거리며 방황하는 청년이 하나 있었다. 료켄은 진작 그를 발견했던 모양이다. 사정은 알겠지만 유사쿠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어울려줄지 거절할지, 그 답을 품은 입을 열려는 찰나 여인이 다시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쪽, 광장에 있는 핫도그 트럭에서 자주 보였던 애지? 덴시티 하이스쿨 교복. 핫도그 먹으러 갈 때마다 봤던 것 같은데.”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여인이 건넨 말에 유사쿠는 조금 놀랐다. 여인이 말한 핫도그 트럭이라면, 유사쿠의 몇 안 되는 지인 중에서도 손꼽는 쿠사나기 쇼이치가 운영하는 가게를 말하는 것이리라. 실제로 학교가 끝나고 다른 볼일이 있지 않은 한, 유사쿠는 그의 가게 앞에서 적당한 의자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있거나 일을 거들곤 했다.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을 일일이 살펴볼 만큼 호기심이나 배려심을 기르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여인이 낯익지는 않았지만, 기억에 얼핏 떠오르는 모습은 있었다. 아무래도 여인의 발언은 염탐이나 뒷조사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목격자의 증언으로 보였다.
결국 유사쿠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하고, 여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침묵으로 결정했다. 유사쿠는 쿠사나기 쇼이치에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아왔고, 이번에 배에 오르는 일에도 그가 전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그런 쿠사나기의 영업 손님에게 냉정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여인은 유사쿠가 자신을 내쫓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 모양이었다. 립스틱 자국조차 거의 남기지 않고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신 그녀가 자신감이 엿보이는 양귀비처럼 눈웃음쳤으나 유사쿠는 적당히 시선을 돌려 모른 척했다.
유사쿠에게서 묵인을 얻어낸 여인은 곧이어 료켄을 돌아보았다. 료켄을 유사쿠의 일행이라 판단하고 나온 행동 같았다. 이내 료켄의 얼굴을 시야에 담은 여인이 드레스처럼 자줏빛을 머금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자신의 외모가 얼마나 가치 않는 무기이자 도구인지 아는 만큼, 그녀는 타인의 외적인 가치도 알아볼 수 있었다. 유사쿠도 상등품이었지만, 료켄은 더 특별했다. 그러나 여인은 입은 열었어도 목소리는 한 발짝도 내지 못했다.
“꺄아악! 사, 사람이! 사람이――――!”
천을 몇 가닥이고 찢어내는 소리보다 높고 날카로운 비명이 여인의 등 뒤에서 벼락같이 태어났다. 이변을 감지한 타인의 소음에 도리어 짓밟혀 묻혀버린 신음으로 목을 긁어내리던 애처로운 피해자는 결국 입안에 들이닥친 죽음을 뱉어내지 못하고 고스란히 삼켜졌다. 살아생전 귀빈석의 명예를 거들먹거리며 즐겼을 육체는 이젠 의자에서 볼품없이 쫓겨나 그가 흘리지도 않은 피처럼 붉은 카펫 위로 쓰러졌다. 권좌에 어울리지 않게 마른 몸이 추락하는 소리는 두꺼운 고급 융단과 최고조에 달한 경악과 충격과 흥분이 연주하는 비명의 안배로 그 어느 귀에도 닿지 않았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세 사람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연회의 한복판, 누구나 호화롭게 식사를 누릴 권리가 있는 만찬 중에 마치 식재료의 하나처럼 목숨을 빼앗긴 자가 있다. 유사쿠는 아주 짧은, 손끝으로 쫓지도 못할 만큼 찰나에 료켄의 표정이 지금까지의 인상을 갈아치우듯 찡그려졌던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유사쿠는 눈썰미가 좋았다. 그의 통찰력은 지금까지 말로 형언 되지 않은 겉모습의 안쪽을 들여다보았고, 중구난방으로 늘어놓은 사건들 가운데서도 일련의 연관성을 잡아냈다. 때때로 유사쿠는 자신이 가진 특별한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유사쿠는 서두르지 않고 소음의 근원지로 향하던 도중, 잠시 자신처럼 테이블을 벗어나 대각선 방향에 서 있는 료켄을 바라보았다.
료켄의 근처에 어느새인가 유사쿠 또래의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료켄보다도 옷차림이 말쑥하기 때문인지 얼핏 보면 어른처럼 보인다. 유사쿠는 그가 유령처럼 사람들 틈에서 나타나 자연스럽게 료켄 옆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도 식사 중에 료켄이 말했던 일행이 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곧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단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가려진 것인지, 완벽하게 이 자리를 벗어난 것인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순간이었다. 유사쿠는 그들을 뒤쫓지 않기로 침착하게 결정을 내리고 다만 그들의 인상착의를 꼼꼼하게 머릿속 회로에 기록했다. 저장을 마치고는 다시 웅성거리며 모여드는 사람들 틈새로 용케 쓰러진 자가 누구인지 살폈다.
유사쿠의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최근 뉴스뿐만 아니라 승선을 준비하며 몇 번이고 봤던 얼굴. 분명 키타무라라고 했던가. SOL 테크놀로지의 보안부장이다. 옷차림은 스크린에서 보던 것보다 과할 정도로 화려했지만, 사람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다. 키타무라는 목에 음식이 걸렸을 뿐인지 정말로 잘못된 것을 삼켰던 것인지, 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쥔 자세가 기괴했고, 근육에 경련이 오지 않았을까 의심될 정도로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 경로가 무엇이 되었든, 그는 확실하게 죽음에 이르러 있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유사쿠는 잘 절제했다. 그는 다른 몇몇 사람들, 특히 부인과 자녀를 데리고 온 이들이 그리 하듯이 자신의 테이블 주위로 돌아왔다. 그리고 머릿속에 품은 생각을 입 밖에 내는 대신 유사쿠는 청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메일 한 통을 보냈다. 기종은 블랙베리의 물건이었고, 학생이 들고 있기에 과하게 고가의 제품은 아니었다. 역할을 마친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유사쿠는 한 번 더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부드러운 은발에 벽안이 예리한 청년은 끝끝내 보이지 않았다.
* * *
혼란을 정리하고 상황을 주도한 것은 홀 바깥에서 들어온 푸른빛의 머리카락과 연한 보라색의 눈동자를 지닌 남자였다. 유사쿠는 그 또한 알아보았다. 자이젠 아키라. 모종의 이유로 좌천되기 전까지, 키타무라가 기어올라 앉아있던 SOL 테크놀로지의 보안부장 자리를 본래 맡고 있던 주인이었다.
자이젠이 들어와 이젠 상사라 부를 수 없는 시체에 흰 천을 덮고, 부하들을 시켜 키타무라의 상차림에 투명한 뚜껑을 씌우도록 하는 모습이 보였다. 현장 보존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손님들에게 경찰을 불렀다는 사실을 밝히며 안심시킴과 동시에, SOL 테크놀로지 사를 대표해 허리를 깊게 숙여 사과와 위로의 말을 올렸다. 그의 행동거지를 보아하니 현재 이 배에 그보다 더 높은 직급의 위인은 오르지 않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자이젠의 냉정하고 침착한 대처에 공황에 가까웠던 소음들은 가라앉는 듯 보였다. 그러나 판단력을 흐리는 혼란의 극치가 사그라지자 도리어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나왔다. 살인이라고 주장하며 신경질을 부리는 무리, 당장 객실로 돌아가겠다며 역정을 내는 일행, 육지로 돌아가야겠다며 배를 돌리거나 하다못해 보트를 내놓으라고 억지를 쓰는 축들. 무엇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뚜렷하게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이기심과 고집의 고함이 높았다. 자이젠을 따라 뒤늦게 홀로 들어온 갈색 머리카락의 여직원이 창백하게 질려버릴 기세였다.
결국 어렵사리 자이젠이 발언을 시작하려는 순간, 모든 목소리를 불시에 가라앉히고 수많은 진영을 하나로 모으는 창이 날아들었다. 새된 목소리는 흥분과 격앙으로 뒤죽박죽 들떠 있어 성별도 연령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홀에 있는 사람이라면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그 귀에 내리꽂혔다.
“하, 하노이다. 하노이, 하노이의 짓이야. 하노이의 기사가 한 짓이 분명해!”
그 말에는 유사쿠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교적 힘을 풀고 있던 눈매가 대번에 강경하고 날카로워졌다. 누군가 지켜보았다면 급변한 분위기가 주는 압박감에 숨이라도 죽였겠지만, 유사쿠는 누구의 관심에서도 비켜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그는 제일 처음 하노이의 이름을 외친 인물을 찾으려 시선을 들었다. 그러나 이미 열릴 수 있는 입들은 전부 이 공식적인 작위가 없는 기사들의 이야기로 시끄러워 근원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하노이의 기사는 이 땅과 바다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악명이었으며, 공포의 실체였고, 존재를 알지만 떨쳐낼 수 없는 그림자처럼 도사린 위협이었다. 조직의 이름과 행적은 도시에서 만연하게 알 수 있어도, 규모와 이동 경로와 수뇌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공공연히 SOL 테크놀로지와 그와 연관된 귀족들에게 원한을 품고 활동했다. 최하층의 말단에 불과한 조무래기들이 민가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 드물게 있는 것만 제외하면, 하노이의 기사는 기본적으로 SOL 테크놀로지가 손을 대는 일에 나타났다. 많은 세부사항을 침묵의 미덕에 감춘 조직치고는 행보가 공개적이어서 이번 사건에 쉽게 하노이의 기사를 연상하는 일은 당연했다.
그러나 유사쿠는 탐탁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아직은 그가 보고 느낄 수 있는 진상들이 너무 적어 자신이 느낀 위화감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줄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 하노이의 기사를 위해 변호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SOL 테크놀로지도 하노이의 기사에 대한 앙심이 깊겠지만, 유사쿠는 그보다 좀 더 오래되고 개인적이며 직접적인 복수심이 있다.
유사쿠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다시금 메일을 보내는 손가락은 아까보다 빠르고 다스려지지 않은 격렬한 동작을 보였다. 내용을 검토하지도 않고 발송 버튼을 누른 뒤에는 자이젠 쪽을 바라본다. 갈색 머리칼의 여직원이 어딘가에서 연락을 받고 자이젠에게 말을 전하고 있었다.
“자이젠 과장님, 해양 경찰이 도착했대요. 인근 천해(淺海)를 순찰하던 중에 본부에서 연락을 받았다고……. 승선 허가를 달라는 모양이에요.”
“그래?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해서 다행이군. 하야미, 승무원을 몇 명 데려가서 승선을 돕고 상황을 전달하도록 해. 가능한 한 서둘러줘.”
“넵, 알겠습니다, 자이젠 과장님!”
기합이 잔뜩 들어간 대답을 내놓은 하야미라는 여직원이 거수경례까지 올리고 홀에서 뛰쳐나간다. 유사쿠는 대화의 알맹이만 듣고, 직원의 이름 같은 것은 귓가를 스쳐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찌 되었든 경찰이 도착한 것은 희소식이었다. 자이젠의 업무 처리 능력이나 사람을 다루는 기술은 제쳐두더라도, 과장 혼자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무기로 남용하는 축들을 상대하는 건 어렵겠지. 저들은 자신이 공권력 위에 서 있다고 믿고 싶겠지만, 그것은 의무를 뛰어넘는 권력을 쉬쉬 눈감아줄 수 있는 일상 상황에 한정이다.
첫째로 물 위를 걷는 능력이나 이동 수단을 지참하지 않는 한 누구도 선박 위에서 도망칠 수 없는 폐쇄적인 공간. 둘째로 어느 누가 특정한 음식을 먹게 될지 알 수 없는 뷔페로 차려진 만찬. 셋째로 직위상 주위에 사람, 즉 보는 눈이 많은 키타무라의 위치. 이 3가지의 지극히 난도 높은 조건에도 아랑곳없이 자행된 살인 사건. 경찰이 머리가 있다면 권위가 통제 바깥에 서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일이다. 유사쿠는 도착할 경찰이 똑바로 된 사람들이길 바랐다. 아무려나 유사쿠는 그리 경찰 앞에 서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유사쿠는 테이블 위에서 커피잔을 찾아 들어 올렸다. 이미 형편없이 식어 맛도 애매해져 있었지만, 유사쿠는 묵묵히 남아 있던 커피를 끝까지 다 마셔 목구멍으로 넘겼다. 오늘은 아무래도 밤늦은 시각, 핸드폰의 디지털 달력이 가리키는 날짜가 바뀌도록 깨어서 달빛과 함께해야 할 것 같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 * *
임시로 홀의 폐쇄와 출입의 통제를 맡아준 해양 경찰들이 유람선 위로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부의 경찰이 들이닥쳤다. 헬기와 보트 양쪽을 이용했더니 30분도 되지 않아 필요한 인력들이 모두 도착했다. 유사쿠가 기다리던 사람은 보트를 통해서 왔다. 유사쿠는 구석진 테이블 옆에 서 있었지만, 상대가 자신을 찾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도쥰 켄고라 이름을 밝힌 경찰 쪽의 상관과 자이젠이 형식적이고 메마른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특이하게도 오른쪽 손에만 새까만 장갑을 틈 하나 없이 꼭 맞도록 끼고 있었다. 유사쿠는 도쥰의 왼편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후드를 뒤집어써서 앳된 생김새를 최대한 가리고 있던 소년은 도쥰과 손짓과 눈짓을 화려하게 섞어가며 꽤 강렬한 묵언의 대화를 나누더니, 곧 그의 곁에서 벗어나 유사쿠를 향해 다가왔다. 중간에 방향을 헤매며 조금 미적거리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올바르게 도착했으므로 유사쿠는 아무런 말도 첨언하지 않았다.
“타케루.”
“생각보다 빨리 왔어.”
“상사가 우수한 덕분에.”
한눈에 보아도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타케루가 유사쿠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타케루는 대놓고 도쥰을 싫어하며 혀를 찼고, 도쥰도 도쥰 나름대로 타케루를 맹랑한 꼬맹이라 부르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용케 그런 사이에 여기까지 데려다 달라는 말이 들어먹혔다. 유사쿠는 그 이유에 대해 굳이 파고들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타케루가 도쥰 켄고에게 사적인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만 숙지하고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유사쿠와 타케루는 테이블 뒤로 돌아갔다. 할 수만 있다면 홀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편하겠지만, 출입 통제는 공평해야 옳다. 타인의 시야에서 비켜났다는 생각이 들자 후드를 벗으려던 행동을 유사쿠가 저지하자, 타케루는 순순히 그 뜻을 받아들이고 먼저 입을 열었다.
“기껏 나온 바다 여행인데 이런 사건이 생기다니 유감이야. 유사쿠는 괜찮아?”
“아직은. 쿠사나기 씨한테 얼마나 듣고 왔어?”
“유사쿠가 메일로 보내준 내용은 전부. …하노이의 기사 짓이라는 말은, 사실이야?”
평탄하게 대답하던 타케루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져 은밀하게 질문을 건넨다. 언뜻 보기에 순진한 선을 그리던 얼굴이 노골적인 적대감으로 물들었다. 유사쿠가 눈매를 바꾸는 것 못지않은, 오히려 스위치 하나에 불이 타오르고 꺼지듯 격렬하고 매서운 기세가 벼 이삭처럼 나긋하던 타케루를 휘감는다. 유사쿠는 타케루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유사쿠의 대답은 언제나 격전지를 앞두고 그러했듯이 심사숙고 끝에 나왔다.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지. 언뜻 보기엔 타당하니까. 이미 모두가 그들 짓이라고 믿고 있어.”
유사쿠는 조금 전 물웅덩이에 던져진 돌 하나가 파문이 되고 해일이 되어 기어코 청중 전부를 덮쳐 휩쓸었던 것을 기억했다. 하노이의 기사는 이름 하나에 그만한 영향을 줄 힘을 얻을 정도로 자라났다.
유사쿠는 눈을 내리깔았다. 단순히 시선을 감추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쪽 손이 하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생각에 몰두할 때면 나오는 버릇이다.
타케루는 유사쿠 특유의 몸짓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몸을 돌려 도쥰에게 돌아가려고 했다. 산불이 번지는 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듯, 성급한 면이 있는 타케루가 수사 방향을 조언하려던 것이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유사쿠가 붙잡아 막았다.
“왜 그래, 유사쿠? 하노이의 기사라면 서둘러야지!”
“잠깐만 기다려. 어딘가 석연치 않아.”
“…유사쿠?”
마음이 급해진 탓인지 유사쿠를 상대로도 호전적인 목소리를 내던 타케루는 그제야 유사쿠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타케루도 유사쿠가 하노이의 기사에게 얼마나 깊은 원한을 지녔는지, 전부는 아니지만 부족함 없이는 알고 있었다. 공감도 대변도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유사쿠가 평소와 달리 하노이의 기사가 이름을 올린 일에 적극적으로 걸음을 내딛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살인에 하노이의 기사를 끼워 맞추는 일이 어딘가 마음에 걸려. 그래, 내키지 않아.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져.”
“하지만 하노이의 기사가 아니면 누가 SOL 테크놀로지의 간부를 건드려?”
“겉보기는 확실히 그렇지. 하지만 뭔가 매끄럽지 않아.”
순조롭게 흘러가지 못하고 사고의 전개를 붙잡는 것은 무엇일까. 수법이 그들답지 않았나? 그들이 손을 쓰기에는 적합한 상황이 아니었나? 그것도 아니면……. 침묵이 한 계단 한 계단 깊어진다. 에메랄드가 그늘 속에서 스스로 반짝이기라도 하는 듯 뚜렷하고 총명한 녹색 눈동자가 날카로웠다.
타케루는 유사쿠가 쉬이 설명을 내놓지 않으리라는 느낌을 받았는지 투박한 한숨과 함께 풀썩 의자에 앉았다. 타케루 이외에도 경찰이 왔다는 사실에 안도했는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입구 쪽에서는 살인에 대한 공포로 내보내 달라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는 소란이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타케루는 유사쿠가 저녁을 먹다 남긴 접시는 신경 쓰지 않고 후드 주머니에서 비닐봉지에 넉넉하게 담긴 쿠키 꾸러미를 꺼냈다. 유사쿠는 그것이 쿠사나기 쇼이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보았다. 타케루가 친근하게 쿠키 봉지를 내민다. 그는 아까보다는 침착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유사쿠가 그렇다고 한다면 믿을게. 하지만 나나 쿠사나기 씨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꼭 알려줘. 우리 둘 다 너를 돕기 위해 준비한 사람들이니까.”
“그래, 알고 있어. 고마워.”
유사쿠는 서툴지만 진심을 담아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유사쿠의 진솔한 감사가 쑥스러운지 타케루는 시선을 내리깔며 작게 웃었다.
잠시 시선을 돌려 유사쿠는 타케루의 손에서 쿠키를 하나 가져갔다. 커피의 쓴맛이 감돌던 입안에 설탕의 양을 조절해 단맛을 노련하게 제어한 쿠키가 들어가자 텁텁하던 느낌이 조금 잦아들었다.
“아, 그런데 쿠사나기 씨, 동생의 상황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 유사쿠, 서둘러야 해.”
“그래.”
쿠사나기 쇼이치의 동생, 쿠사나기 진이 거론되자 유사쿠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조급한 기색이 떠오르고자 언뜻 모습을 비췄으나 감정을 갈무리하는 데 능숙한 유사쿠는 쉽게 틈을 보이지 않는다. 유사쿠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타케루도 긴장한 표정을 최대한 빨리 흩어 얼굴에서 지웠다.
“그리고 유사쿠의 장비, 제대로 가져왔어. 지금 주기는 어려우니까 이따 방으로 갈게.”
“어려운 부탁을 해서 미안해.”
“미안해하지 마. 이런 일을 하려고 도와주겠다고 나선 거잖아.”
타케루는 겸손하고 선량하게 웃어 보였지만, 유사쿠는 단순히 어렵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위험을 동반하는 운송이었다. 그러나 유사쿠를 신뢰하고 쿠사나기를 의지하는 타케루는 빈말로도 불만이나 불평 한마디 내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유사쿠도 말로만 끝내기에는 알맞지 않은 고마움은 삼켜 넣고 타케루가 건네는 쿠키를 봉지째 받아들었다. 분명 구운 지 시간이 제법 지났을 터인데, 타케루가 계속 갖고 있던 탓인지 봉지가 기분 좋게 미지근했다. 막 앉았을 뿐인 타케루가 다시 일어났다.
“그럼 잠시 저쪽에 다녀올게. 언제쯤 빠져나올 수 있을지 알아보기도 해야겠고,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도와야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해준 건 사실이고.”
거북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잘도 돕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온다. 정말 어지간히도 도쥰 켄고와 상극인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타케루가 유사쿠 앞에서 그를 제대로 된 이름과 존칭을 갖추어 부른 쪽이 오히려 드물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유사쿠는 고개만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후드를 살짝 만지작거리던 타케루는 이내 눈짓으로 인사를 보내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기 싫은 일, 빨리 해치워 버리기라도 하자는 느낌이 물씬 났으나 착각에 불과하지는 않아 보였다. 성격이 조금 더 나긋했다면 웃음을 지을 수도 있는 타케루의 뒷모습을 잠잠하게 바라보며, 유사쿠는 손에 들었던 쿠키를 내려놓았다. 테이블보는 촉감이 고와 비닐이 위에 놓여도 귀에 걸리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함부로 내지 않는다. 시선은 쿠키를 벗어나 은촛대를 향했다.
촛대는 음각과 양각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독특한 문양을 이루고 있었고, 기둥 밑쪽, 즉 촛불의 직접적인 열기를 받지 않는 위치에 장식을 위한 조그만 색유리가 박혀 있었다. 불빛을 잘 받는다면 누가 보아도 보석이라고 생각할 자태다. 은촛대의 전체적인 조화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각각의 색유리는 채도가 다양한 금빛을 띠고 있었다.
유사쿠의 손가락이 그들 유리를 쓸어보려다 문득 무언가에 걸린 듯이 멈추어 선다. 유사쿠는 생각을 바꿔 손을 멀리 떼어냈다. 도청기의 성능이 어디까지 우수한지 모르는 유사쿠로서는 괜한 잡음을 섞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타케루에게는 귀띔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안타깝게도 기계를 다루는 일이 둔하고, 또 스스로 그 사실에 가볍게 절망하고 있는 친구에게 굳이 기계에 관한 근심을 늘려줄 필요는 없다. 유사쿠는 은촛대의 색유리 일부가 도청기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 * *
유람선의 객실 복도는 홀 못지않게 고급스럽고 우아해 밝은 색조를 주로 사용했고, 백금색 벽에는 고풍스러운 외관과 밝기 조절이 용이한 실용성을 동시에 갖춘 등불이 띄엄띄엄 존재를 발산하고 있었다. 바닥을 덮은 융단은 홀의 것처럼 붉었지만, 더 어두운 색채로 물들여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고상함을 강조했다. 금실 자수의 패턴도 보다 간략했고, 혹여 맨발로 복도를 걸어 다닐 일이 있더라도 불편하지 않도록 훨씬 털이 부드럽고 푹신했다. 구두를 신은 사람의 걸음 소리라도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흡수하는 일에 적합했다.
유사쿠는 조심스럽게 비상구에서 빠져 나와 복도에 발을 디뎠다. 카드 키가 있어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는 있었지만, 엘리베이터부터 객실 복도 전체의 CCTV에 간섭하는 작업은 복잡했다. 그러나 비상계단에는 감시 카메라가 하나도 없다. 웃기는 일이었다. 아무리 깨끗한 기업이 아니라 해도 이렇게 손속이 물러서야. 하노이의 기사가 SOL 테크놀로지를 깔보며 날뛰는 일을 변호할 입은 설령 있더라도 닥쳐야 할 것이다.
저녁 만찬이 무르익던 중에 변을 당했으므로 경찰의 현장 조사와 증언 확보가 이루어지고 일시적으로 승객들을 방으로 돌려보낸 것은 기어코 늦은 밤을 맞이한 이후였다. 거의 모든 손님이 녹초가 되어 풀려났고, 혹시 잠 못 드는 이가 있더라도 겉보기에 복도는 정적이 흘렀다. 물론 끝까지 자존심과 자만심을 못 버리고 거만하게 큰소리를 치고 나간 이들도 있었지만, 살인범보다 더 냉혹한 얼굴을 한 도쥰은 아예 들은 척도 안 했다. 결과적으로 유사쿠가 움직일 기회를 얻은 것도 결국 날짜가 바뀌어 시침이 한 자릿수로 향한 뒤다. 유사쿠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사실에 웃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타케루는 유사쿠의 객실에 있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를 위해 배정된 객실이 있을 리 없고, 그렇다고 도쥰 켄고와 한방을 쓰라고 한다면 결코 이 시간이 고운 밤으로 남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탓이었다. 둘째로는 유사쿠의 방에 있으면 아무리 기계와 상성이 나쁜 미다스의 손이라도 쿠사나기와의 연락 정도는 타케루가 도와줄 수 있는 까닭이었다. 마지막, 셋째로는 타케루 자신도 스스로 잠입과 영 맞지 않는 성격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유사쿠가 차라리 홀가분하게 혼자 움직이기로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유사쿠는 자신의 현황에 시선을 돌렸다. 융단이 푹신하게 잘 깔려 있어 굳이 발소리를 죽이려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좋았다. CCTV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조금 전 간섭해서 20분 정도는 텅 빈 복도의 똑같은 영상이 반복되도록 조작했다. 경찰이 순찰하는 경로와 시간대도 타케루가 알려주었다. 객실을 드나드는 다른 승객이나 승무원 정도가 위험이 되는 요소였지만, 유사쿠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근거는 제대로 있었다.
유사쿠는 복도에 나란히 늘어선 여러 문 중 특별히 다른 점이 보이지 않는 하나의 문 앞에 멈춰섰다. 마치 숫자 패를 보지 않고도 누구의 방인지 훤히 알아보는 사람 같았다. 유사쿠는 신중함을 더하여 주위를 둘러보고 양손에 흰 장갑을 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문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초인종은 본 체도 하지 않고 몸을 숙여 전자식 도어 락이나 살폈다. SOL의 시스템 보안망은 몰라도, 객실 도어 락 따위는 유사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어스름이 창공과 심해를 가리지 않고 은덕을 베푸는 시간에도 또랑또랑한 초록빛 눈동자가 영민하게 움직였다. 검은 패널이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고, 여러 문양을 조각하고 도금하여 전자 기기 특유의 차갑고 무기질한 느낌을 최대한 억누른 장치다. 겉보기는 화려하고 웅장하지만, 침략의 난이도까지 끌어올려 주지는 못했다. 유사쿠는 어려움 없이 잠금장치에 손을 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침묵의 시종이 수발들던 복도에서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는 ‘알아차렸다’.
“―!”
“거기까지. 모처럼 찾아온 대범하고 용기 있는 손님을 총알 하나로 대접하긴 아쉬우니,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뒤통수에 닿은 금속은 동그랗고 지름이 얇았다. 유사쿠는 노골적으로 주어진 증거에서 명백한 답을 도출해내지 못할 정도로 아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에서 음산할 정도로 낮게 굽어살핀 목소리는 이미 알고 있는 음색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몸소 체험하니 전율이 순간 척추를 내달렸다. 위협의 수단이 없다는 증명으로 양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소매 끝으로 손목이 살짝 드러나 소름 돋은 모양이 보일 듯 말 듯 불분명했다.
“네놈이 그저 좀도둑이라 믿기에는 격이 맞지 않겠군. 넌 여기가 누구의 방인지 알고 왔구나.”
“…그래, 모를 리가 없지. 하노이의 기사. 아니, 너는 기사단장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가?”
위협이 실탄을 얻어 제 머리를 꿰뚫지 않도록 유사쿠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가장 자랑스럽고 탁월한 무기를 자신의 상징이자 대명사로 삼은 하노이의 기사단장이 회전하는 여섯 발의 실린더가 이름으로 봉해진 총을 쥐고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진심으로 즐거워서 입술이 자아낸 미소는 아닐 터였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문맹 수준으로 표현이 부족한 얼굴에 곡선이 그려지니, 일반인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 미소가 비틀렸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사쿠는 동요 없이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내는 일이 가능했다.
“리볼버. ―아니, 료켄.”
“그래, 내가 바로 리볼버. 하노이의 기사를 이끄는 리더다.”
한때는 새하얀 테이블보 너머로 겸손하고 온유하게 웃으며 몸에 밴 식사 예절을 기품 있게 실천하던 청년은, 엄중하고 잔혹한 이름을 선뜻 긍정했다. 료켄은 진상을 파악하고 이 자리에 도달한 유사쿠에게 굳이 선량한 인상을 가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웃음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자아내던 눈매는 지적이고 합리적인 결단력을 담아 날카롭게 뻗었고, 미풍 같던 눈동자가 북극해의 빙산처럼 얼어붙었으며, 입술은 상냥한 말과 미소를 읊조리는 대신 엄격하고 고집스럽게 다물렸다. 귀에는 못 보던 탄피 모양의 장식이 매달려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귀에 구멍을 뚫지 않고도 착용할 수 있는 이어커프 형식이었다.
유사쿠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료켄의 시선보다 직접적이고 집요하며 흉포한 위협, 자신의 머리를 겨눈 총구를 바라보았다. 하노이의 리더씩이나 되는 인물이 평범한 시판품을 쓸 리 없다고 생각했던 그대로, 정교하고 세심하게 개조된 리볼버다. 붉은색을 기조로 둔 몸체에 새카만 실린더가 달려 있고, 음각으로 새긴 무늬는 회로가 지나가며 희미하게 청록색으로 빛났다. 둔탁한 광이 나는 검은 총구는 특수하게 처리해서 마감한 듯이 보였다. 생김새만 보아도 흉악한 이 권총이 들려있는 손은 정작 손가락이 가늘고 길어 우아한, 귀공자의 느낌이 물씬 드는 손이라는 사실은 역설이었지만, 동시에 무서울 정도로 잘 어울렸다.
“이곳에 무슨 수작을 부리러 왔는지 묻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군. 내가 하노이의 기사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이지? 대답해라.”
탄환의 문을 눈앞에 둔 사람답지 않은 유사쿠의 침착함을 흐트러뜨려 보려는지 료켄이 다시금 유사쿠의 미간에 리볼버를 조준했다. 모양도 빛깔도 나무랄 곳 없는 입술에서 열린 목소리는 나른하게 웃음기라도 머금은 듯이 들렸으나 이내 급격하게 색을 달리해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린다. 질문을 던지는 눈빛은 숨김없는 진실을 원했다. 그리고 견고한 침착함과 이성이 흔들리는 법 없이 유사쿠는 긴장감에 조금 마른 입을 담담하게 열었다.
“내가 너를 하노이의 기사라고 생각한 이유는 세 가지가 있어.”
“…세 가지?”
“첫 번째는 홀에서 들었던 네 이름. 료켄이라는 이름은 SOL 테크놀로지가 가진 승객 명단에 있었어. 가명일 수도 있겠지만, 고작해야 연고도 없어 보이는 고등학생 상대로 가명은 과하지.”
유사쿠의 입에서 풀어져 나오는 이야기에 료켄의 안색이 변한다. 방아쇠는 유사쿠가 자연스럽게 사용한 ‘3가지’의 말버릇이었으나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의식중에 추측하기로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유사쿠가 SOL 테크놀로지 소유의 문서에 접근할 수 있을 만큼의 해킹 실력을 지녔다는 사실에 반응한 것으로 여겼다.
손을 들어 곧게 집게손가락을 펴는 것으로 숫자를 표현한 유사쿠는 다음 손가락을 펴며 말을 이었다. 자신의 길을 굳건히 나아가는 태도였다.
“두 번째는 SOL 테크놀로지의 간부가 죽었을 때 네가 보였던 표정이다. 그건 갑작스러운 사고 따위에 당황한 표정이 아니었어. 오히려 일에 착오가 생겼다는 표정이었다. …너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가 결국 살해당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료켄은 표정을 굳히고 침묵을 늘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사쿠도 별다른 기대가 없었기에 기다리지 않고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폈다.
“세 번째는 지금 네가 나에게 겨눈 리볼버. 존엄하신 하노이의 기사단장이 특별히 이 권총을 총애하여 자신을 대표하는 명사로 삼은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어. 그러니 유추하는 건 쉬웠다.”
유사쿠가 내놓은 3가지 근거는 타당했다. 듣고 있는 당사자인 료켄도 인정할 실력이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이 유사쿠만큼 탁월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분개해도 이해받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게 한 방 맞은 셈이었다. 료켄의 미소가 금세 비틀렸다. 그는 짧은 시간 안에 마음을 추스른 모양이었다.
“호오, 과연 단신으로 하노이의 객실을 염탐하려들 만큼의 실력은 갖췄다는 것인가 칭찬하지.”
“…….”
“이 녀석이 이름은 바렐로드. 하노이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나의 숭고한 힘 중 하나다.”
무기에 대한 소개가 제법 정중하다. 하노이의 기사에게 칭찬을 받은 부분에서 이미 실소가 나왔으나 유사쿠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한순간 의지가 반짝이는 녹안과 냉기를 두른 벽안이 격돌했다. 오로지 두 사람뿐인 그림자가 벽과 융단 위로 몇 겹의 베일을 더하는 와중에 새로운 불꽃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웃음을 짓느라 곡선을 그린 입술을 그대로 연 것은 료켄이었다. 그는 유사쿠가 반응하기 전에 그의 옷깃을 감아쥐었다. 유사쿠는 홀에서 객실로 돌아갔을 때 흰 와이셔츠 대신 어두운 색의 티셔츠와 후드로 갈아입었던지라 료켄이 붙잡을 곳은 많았다.
“이대로 네놈과 대치하는 것도 시시하지 않은 여흥이 되겠다만, 네가 감시의 눈을 속인 20분의 유예는 짧게 끝났군. 자리를 이동하지.”
빙빙 돌려 표현했지만, 결국 유사쿠가 CCTV에 간섭해서 만들었던 20분의 시간이 거의 끝나간다는 뜻이다. 체격도 신장도 료켄 쪽이 유사쿠보다 월등하게 먼저 성장하여 농숙한 어른의 형세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옷깃을 붙잡은 그대로 남자 고등학생 하나를 일으켜 잠금장치를 해제한 문 안으로 집어 던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유사쿠는 료켄이 내던진 그대로 방 안쪽으로 삼켜졌지만 아슬아슬하게 넘어지지는 않았다.
입구의 감지기가 사람의 출입을 인식하자 캄캄하던 실내에 자동으로 불이 들어왔다. 복도가 그리 어둡지 않았으므로 갑자기 불이 켜진다고 눈이 부시진 않았으나 대응은 차례로 늦어졌다. 유사쿠가 고개를 드는 짧은 사이에 등 뒤로 문이 닫혔고, 어느새 료켄은 그의 앞에서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사쿠의 등은 문과 맞닿았고, 입술은 타인의 것과 부딪쳤다.
“―!”
설명은 장황할 필요가 없다. 유사쿠는 자신이 료켄에게 입맞춤, 소위 말하는 키스를 당하고 있는 상황에 눈을 부릅떴다. 료켄은 태연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찰나지만 독사를 마주 본 것만 같은 감상이 척추를 싸늘하게 타고 흘렀다. 유사쿠에게는 완전무결하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유사쿠는 뻣뻣하게 굳어,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즉각 판단해냈을 적정한 대처 방법을 찾지 못하고 료켄의 팔만 붙잡았다.
그 어떠한 가능성도 유사쿠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료켄의 행동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어느 순간 유사쿠는 자신의 입안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축축한 살덩이 이외의 촉감을 분별해냈다. 그것은 뒤엉키는 온기 한복판에 있어 빠르게 열을 머금기 시작했으나 특유의 선뜩한 차가움을 내장했고, 인체에서는 나지 않는 비린 맛이 났다. 료켄은 유사쿠에게 정체 모를 기계 장치를 삼키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무엇이 되었든지 결코 호의적이지 않으리라.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유사쿠는 자신의 입안을 무례하게 침범한 모든 것을 뱉어내려는 반항을 보였다. 순수한 분노로는 규정할 수 없는 감정에 몸을 떨며 료켄을 밀쳐내려 했으나, 단단하게 조형이 잡힌 몸은 무르지 않았다. 그리고 키 차이가 있어 유사쿠의 고개는 미세하지만 들려있었다.
문득, 어느 쪽이든 속눈썹이 풍성하고 길게 뻗었으므로 바짝 다가붙은 탓에 서로서로 속눈썹을 간지럽혔다. 유사쿠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느꼈다. 다음 순간 버티지 못하고 유사쿠는 목구멍을 찌르는 쇳덩이를 그대로 삼켰다. 해방은 그제야 찾아왔다.
“―쿨럭, 쿨럭, 큭!”
“콜록…….”
장렬한 기침이 터진 유사쿠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료켄도 잔기침을 뱉어내고 숨을 몰아쉬었다. 우열을 가릴 필요 없이 똑같이 서툴렀고 똑같이 여유가 없었다. 다만 덤벼든 목적을 달성한 료켄이 근소하게 승리에 발을 걸쳤다. 료켄은 유사쿠가 정신을 다잡기 전에, 혹여 그에게 멱살을 잡히는 일이 없도록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니나 다를까, 퍼뜩 고개를 든 유사쿠가 료켄을 노려본다. 온몸의 투지(鬪志)가 눈으로 모여 폭발하기라도 하는 듯이 천하의 료켄도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 만큼 위압적인 안광이었다.
“콜록, 리볼버……!”
“넘겨준 건, 잘 삼킨 모양이군. 너는 혼자서 우리의 뒤를 캐낸 실력자다. 격에 어울리지 않게 무방비한 초대를 허락할 수는 없지.”
유사쿠가 제대로 된 문장을 갖추기도 전에 료켄이 말의 허리가 아닌 목부터 자르고 들어온다. 그 또한 혈색 나쁘던 뺨이 상기되고 숨결이 어지러우며 목소리가 기묘하게 높았지만, 료켄은 그 모든 사실을 뒤덮어버리려는 듯이 도도하게 냉소했다. 귓가에서 이어커프 형식의 탄피 장신구가 조그마한 샹들리에처럼 여러 갈래로 빛을 반사해 시선을 흩었다.
“하지만 자비는 베풀었다. 인체에 유독한 성분은 없―, 윽!”
바로 그 모습이 유사쿠를 움직였다. 유사쿠는 이번만큼은 자신의 행동이 료켄보다 빨랐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온갖 신체적인 시시비비에 익숙하고 노련하며 정통한 친구에게서 수십 차례 교습받았던, 몸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방법. 유사쿠는 료켄을 덮쳐 누르고 냉큼 그 위에 올라탔다. 이것으로 중력은 유사쿠의 아군이자 료켄의 지체를 붙잡고 늘어지는 덫이다. 유사쿠는 처음으로 료켄이 이성을 손에서 잠시 떨어뜨릴 정도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았다.
료켄이 다시 리볼버를 장비하기도 전에 유사쿠는 료켄의 양쪽 손목을 모아 쥐어 한 손으로 바닥에 짓눌렀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유사쿠는 분명 료켄보다 근력이 부족한 편이지만, 체중을 걸어 내리누르면 어중간한 근력의 차이로는 벗어날 수 없다. 유사쿠는 타인이 유도한 대로 놀아나는 일에 상황에 따라 타협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갚아주는 행동 외에는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눈 아래에 놓인 은발 벽안의 청년은, 유사쿠가 반평생이 넘는 시간을 걸어 찾아 마지않던 가장 드높은 깃발이요, 가장 파헤치고 싶었던 진실의 화약을 채운 탄환이다.
“―방심했구나.”
“네놈……!”
이번에는 유사쿠가 웃을 차례였다. 제 아래 깔린 료켄을 굽어살피는 유사쿠의 시선과 웃음은, 그가 남 위에 올라서는 일에 익숙하지 않음에도 자연스럽다. 료켄이 거느린 카리스마와는 색깔이 다르나 이 또한 천성적인 위엄이었다.
료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료켄은 몇 번인가 잡힌 손목을 빼내고자 움직였지만, 체중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유사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료켄은 푸르스름한 눈동자를 매섭게 얼려 유사쿠를 노려보았다. 과연 수도의 경계를 가리지 않고 사회에 큰 파란을 선사한 조직을 지도하는 수장다운 기세와 기개였다. 그러나 마주 보는 사람이 마찬가지로 단단하기 그지없는 강단과 담력을 지닌 유사쿠였기에, 그의 시선은 유사쿠의 눈을 깜빡이게 하지도 못했다. 곧 유사쿠의 입술이 웃음기를 지우고 결연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찾고 있는 물건이 있다. 그리고 너희들은 살인죄의 누명을 벗고 싶겠지?”
“…SOL 간부의 일이 우리의 짓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었나?”
“뭐, 확언할 수 있을 만큼은.”
료켄은 진심으로 놀랐다. 혼란에 돌 하나가 던져진 순간에 홀에 있지는 않았으나 료켄은 정황상 하노이의 기사가 의심받으리라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이미 만일을 대비해 함께 배에 탔던 부하들을 다그쳐 진실로 그들의 짓이 아니라는 맹세까지 받아낸 참이었다. 그러나 진실을 파악할 시간도 증거도 부족했을 유사쿠의 입에서 누명이라는 단어가 확고하게 떨어지자 료켄은 잠시 현황을 내려두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유사쿠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료켄의 질문에 대답하고도 머뭇거림이나 흔들림을 보이지 않으며 유사쿠는 말을 이었다.
“분명 너희는 내가 찾고 있는 물건에 손을 쓸 수 있을 거다. 나를 돕는다면, 나 또한 너희가 누명을 벗겨주겠어.”
“하, 웃기는군. 하노이의 기사는 이미 악명으로 사회의 암막을 지배하고 있다. 이제 와서 사람 하나의 그림자 따위가 더해진다고 해서 우리의 명예가 더 실추될 곳이 있을 것 같나?”
“너희가 SOL 테크놀로지의 장기 말로 쓰이는 일을 묵인할 정도로 자존심이 없다면 말이지.”
“…네놈……, 거기까지?”
료켄은 기어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소년은,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길지 않은 시간과 많지 않은 장소에서 진실한 죄가 하노이의 기사가 아니라 SOL 테크놀로지의 발 앞에 있음을 알아보았을까. 망인(亡人)의 피를, 그 피를 흘리게 한 자들의 머리로 돌려 하노이의 기사가 쓰는 손속을 보여주려던 생각조차도. 아무래도 유사쿠는 거래에 소질이 없는 위인은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진상을 알게 된 과정을 알기 위해서라도, 협력하는 게 너희로서는 좋을 테지.”
마지막 선고였다. 유사쿠는 당연하게 침묵에 빠진 료켄을 내려다보고 잠시 인내의 미덕을 베풀기로 했다. 인내심은 치열하게 필요했다. 하노이의 기사를 앞에 두고도 심장을 뜨겁게 붙들어 놓아주질 않는 복수심과 증오와 원한을 내리누르며 눈빛에, 손끝에, 입술에 드러나지 않도록 감추는 일에는 그 누름돌만큼 무거운 인내심을 소모한다.
분명 갑판 위에는 달이 떠오르고 검푸른 비단옷의 밤바다는 빛의 길을 만들고 있겠지. 유사쿠는 아직 본 적이 없으나 그 길은 분명 침몰하는 사람에게 앞날을 비춰줄 것이다. 유사쿠는 자신의 힘과 의지로 미래를 이끄는 사람이었다. 빛의 길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선사하는 묵언의 갑옷은 요긴하다.
위증(僞證)의 입술들이 입 맞추는 밤이었다.